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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 알아볼 것은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길상사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사찰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애환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리고 무소유 정신이 담겨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고급 요정에서 사찰로 변화한 독특한 배경과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길상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길상사의 유래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무소유의 의미와 사랑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길상사는 1997년 12월 14일에 창건된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며, 서울 도심 속에서 조용한 수행 공간을 제공하는 특별한 사찰입니다. 대지면적은 2만3,140㎡(약 7천여 평)에 달하며, 40여 동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상당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길상사의 가장 큰 특징은 불과 2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찰들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짧은 역사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습니다. 현재는 서울시민들에게 수행공간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만남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길상사가 위치한 자리에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습니다. 대원각은 1970년대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로,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정·재계 실력자들이 즐겨 찾던 '밤의 청와대'로 불렸습니다. 이곳은 군사독재 시절 정치와 경제의 중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지던 은밀한 공간이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대원각은 김영한이라는 여성이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운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영한은 본명이고, 기명은 진향, 법명은 길상화였으며, 별명은 자야였습니다. 그녀는 17세에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이후 사업가로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1995년 6월 13일, 대원각은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되면서 사찰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5월에는 정식으로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했고, 같은 해 12월 14일 역사적인 개원법회를 봉행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개원법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으며, 이는 종교 간 화합의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길상사 유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김영한은 기생 시절 시인 백석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줄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녀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게 됩니다. 해방 후 백석은 월북했고,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두 사람은 영영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각각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영한이 대원각을 시주할 때 사람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말에서 그녀가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상사 창건의 핵심 인물은 바로 법정 스님입니다. 1987년 나이 칠십에 들어선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는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부처님에게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지만, 스님은 처음에 이를 간곡히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가며 끈질기게 부탁했고, 마침내 1995년 법정 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시주된 재산의 가치는 1,000억 원을 넘었으며, 현재 시세로는 조 단위를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머물며 수행했고, 2010년 3월 11일 이곳에서 입적했습니다. 현재 길상사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저서, 평소 쓰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누더기처럼 해진 법복은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묘길상, 즉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승보사찰로 유명한 송광사의 옛 이름이 바로 '길상사'였다는 점입니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이 송광산 길상사였습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이 되었습니다. 길상이라는 말을 좋아하던 법정 스님은 1997년 1월 29일 창건 준비인 모임에서 처음으로 '길상사'라는 절 이름을 공식화했습니다.
또한 법정 스님은 1993년 10월 프랑스에 '송광사 파리 분원 길상사'를 개원한 바 있어, 길상사라는 이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재의 길상사는 종교 간 화합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종교 간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한 관음보살상이 있고,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7층 석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는 서로 축하 현수막을 내거는 등 종교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길상사 경내는 잘 가꾸어진 정원 같은 느낌을 줍니다. 보호수를 비롯한 고목이 많고,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지며, 곳곳에 있는 벤치에서 방문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2016년에는 북카페 '다라니다원'을 새롭게 단장하여 휴식과 독서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종단승인 신도 전문교육기관인 길상사 불교대학이 개원하여 서울시민들에게 수행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Q: 길상사는 언제 창건되었나요?
A: 길상사는 1997년 12월 14일에 개원법회를 봉행하며 정식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비교적 짧은 2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Q: 길상사 자리에 원래 무엇이 있었나요?
A: 원래 이곳에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로 정·재계 실력자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Q: 김영한은 누구인가요?
A: 김영한(1916-1999)은 대원각의 주인으로, 본명은 김영한, 기명은 진향, 법명은 길상화, 별명은 자야였습니다. 시인 백석과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Q: 백석과 김영한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A: 백석은 김영한을 '자야'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그녀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백석이 월북하면서 영영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Q: 김영한이 시주한 재산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A: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을 넘었으며, 대지 2만3,140㎡와 건물 40여 동을 포함합니다. 현재 시세로는 조 단위를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Q: 법정 스님은 왜 처음에 시주를 거절했나요?
A: 무소유를 실천하던 법정 스님에게는 이처럼 큰 재산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10년 가까이 거절했다가 1995년에야 받아들였습니다.
Q: 길상사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라는 의미로, 문수보살의 별칭인 묘길상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입니다. 송광사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Q: 길상사에서 종교 간 화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개원법회 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고, 천주교 신자가 기증한 관음보살상과 기독교 신자가 기증한 석탑이 있으며, 종교 행사 시 서로 축하 현수막을 내겁니다.
Q: 법정 스님과 길상사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A: 법정 스님은 길상사의 창건주로, 이곳에서 수행하며 2010년 3월 11일 입적했습니다. 현재 진영각에 스님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Q: 현재 길상사에는 어떤 시설들이 있나요?
A: 진영각, 길상사도서관, 북카페 '다라니다원', 길상사 불교대학 등이 있으며,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길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사찰인가요?
A: 고급 요정에서 사찰로 변화한 독특한 배경,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 1000억 원 시주라는 극적인 사건, 그리고 무소유 정신이 깃든 특별한 사찰입니다.
길상사의 기본 정보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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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의 가장 큰 특징은 불과 2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찰들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짧은 역사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습니다. 현재는 서울시민들에게 수행공간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만남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대원각에서 길상사로의 극적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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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대원각은 김영한이라는 여성이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운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영한은 본명이고, 기명은 진향, 법명은 길상화였으며, 별명은 자야였습니다. 그녀는 17세에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이후 사업가로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1995년 6월 13일, 대원각은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되면서 사찰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5월에는 정식으로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했고, 같은 해 12월 14일 역사적인 개원법회를 봉행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개원법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으며, 이는 종교 간 화합의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백석과 김영한(자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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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게 됩니다. 해방 후 백석은 월북했고,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두 사람은 영영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각각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영한이 대원각을 시주할 때 사람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말에서 그녀가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과의 특별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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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지만, 스님은 처음에 이를 간곡히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가며 끈질기게 부탁했고, 마침내 1995년 법정 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시주된 재산의 가치는 1,000억 원을 넘었으며, 현재 시세로는 조 단위를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머물며 수행했고, 2010년 3월 11일 이곳에서 입적했습니다. 현재 길상사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저서, 평소 쓰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누더기처럼 해진 법복은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길상사라는 이름에 담긴 깊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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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이 송광산 길상사였습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이 되었습니다. 길상이라는 말을 좋아하던 법정 스님은 1997년 1월 29일 창건 준비인 모임에서 처음으로 '길상사'라는 절 이름을 공식화했습니다.
또한 법정 스님은 1993년 10월 프랑스에 '송광사 파리 분원 길상사'를 개원한 바 있어, 길상사라는 이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재 길상사의 모습과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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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경내는 잘 가꾸어진 정원 같은 느낌을 줍니다. 보호수를 비롯한 고목이 많고,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지며, 곳곳에 있는 벤치에서 방문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2016년에는 북카페 '다라니다원'을 새롭게 단장하여 휴식과 독서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종단승인 신도 전문교육기관인 길상사 불교대학이 개원하여 서울시민들에게 수행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QnA - 길상사 유래 관련 궁금한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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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길상사는 1997년 12월 14일에 개원법회를 봉행하며 정식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비교적 짧은 2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Q: 길상사 자리에 원래 무엇이 있었나요?
A: 원래 이곳에는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로 정·재계 실력자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Q: 김영한은 누구인가요?
A: 김영한(1916-1999)은 대원각의 주인으로, 본명은 김영한, 기명은 진향, 법명은 길상화, 별명은 자야였습니다. 시인 백석과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Q: 백석과 김영한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A: 백석은 김영한을 '자야'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그녀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백석이 월북하면서 영영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Q: 김영한이 시주한 재산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A: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을 넘었으며, 대지 2만3,140㎡와 건물 40여 동을 포함합니다. 현재 시세로는 조 단위를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Q: 법정 스님은 왜 처음에 시주를 거절했나요?
A: 무소유를 실천하던 법정 스님에게는 이처럼 큰 재산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10년 가까이 거절했다가 1995년에야 받아들였습니다.
Q: 길상사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라는 의미로, 문수보살의 별칭인 묘길상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입니다. 송광사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Q: 길상사에서 종교 간 화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개원법회 시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고, 천주교 신자가 기증한 관음보살상과 기독교 신자가 기증한 석탑이 있으며, 종교 행사 시 서로 축하 현수막을 내겁니다.
Q: 법정 스님과 길상사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A: 법정 스님은 길상사의 창건주로, 이곳에서 수행하며 2010년 3월 11일 입적했습니다. 현재 진영각에 스님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Q: 현재 길상사에는 어떤 시설들이 있나요?
A: 진영각, 길상사도서관, 북카페 '다라니다원', 길상사 불교대학 등이 있으며,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길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사찰인가요?
A: 고급 요정에서 사찰로 변화한 독특한 배경,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 1000억 원 시주라는 극적인 사건, 그리고 무소유 정신이 깃든 특별한 사찰입니다.
결론
길상사의 유래는 단순한 사찰 창건 이야기를 넘어 우리 현대사의 애환과 사랑, 그리고 무소유 정신이 어우러진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고급 요정에서 청정한 수행 공간으로 변화한 과정에는 백석과 자야의 애절한 사랑, 김영한의 과감한 시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2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길상사는 종교를 뛰어넘는 화합의 공간이자 서울 시민들에게 소중한 문화적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10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며 아낌없이 시주한 김영한의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과 무소유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럼 여기까지 길상사 유래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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